유형 온 영국 죄수들이 거칠게 건설한 풍요의 국가

[중앙선데이] 입력 2017.06.11 02:17

[비주얼 경제사] 오스트레일리아의 탄생
‘데이비 총독의 대 원주민 포고령, 1816년’ 1828~30년경

‘데이비 총독의 대 원주민 포고령, 1816년’ 1828~30년경

흰 피부의 유럽인들과 검은 피부의 남태평양 원주민들이 등장하는 그림판이다. 첫 줄에는 양측의 어른과 아이가 사이좋게 서 있고, 아기와 개를 서로 돌봐 주고 있다. 둘째 줄은 양측이 손을 잡고 평화롭게 인사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셋째 줄은 원주민이 유럽인을 죽이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내용이고, 넷째 줄은 유럽인이 원주민을 죽이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판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일까?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 독립 후 새 유형지로 주목
1788년부터 이주한 죄수 80만 명
형기 마치면 땅 나눠 받아 새 출발
그 과정서 원주민은 집단학살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개막한 이래 유럽인들은 지구 곳곳을 경쟁적으로 탐험하고 정복과 무역을 통해 활동범위를 넓혔다. 남반구, 특히 태평양 남부는 가장 나중에서야 범지구적 네트워크에 편입된 영역이었다. 유럽인들이 ‘미지의 남방 땅’이라고 불렀던 거대한 땅덩어리 오스트레일리아가 대표적이다. 이 대륙에 유럽 탐험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다. 가장 유명한 탐험가는 영국인 제임스 쿡, 일명 캡틴 쿡이었다. 그는 1770년 이 대륙의 동부를 영국령이라고 선포했다. 경쟁국 프랑스가 먼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할까봐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거주하던 원주민의 의사는 전혀 염두에 넣지 않았다.
 
영국의 영유권 주장도 생뚱맞았지만 이후 영국이 생각해 낸 오스트레일리아 활용 방안은 더욱 예상 밖이었다. 당시 영국은 가혹한 처벌을 담은 형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중범죄가 아니어도 사형에 처해지기 일쑤였고, 경범죄도 징역형으로 다뤄졌다. 엄중한 처벌이 범죄를 억제할 것이라는 인식을 반영한 정책이었다. 이런 정책으로 죄수들을 가둘 공간이 부족해졌다. 한 가지 방안은 노후한 선박을 해안에 정박시켜 감옥선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폭증하는 수감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더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머나먼 식민지로 죄수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새로운 게 아니었다. 영국은 1777년까지 이미 4만 명의 죄수를 미국의 식민지주로 유형 보낸 바 있었다.
 
매쿼리 총독, 인프라 조성해 이민 장려
뉴사우스웨일스로 죄수를 호송하는 수송선의 내부

뉴사우스웨일스로 죄수를 호송하는 수송선의 내부

그런데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이면서 상황이 변했다. 영국은 새로운 유형지를 물색해야만 했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오스트레일리아였다. 1787년 5월, 700여 명의 죄수와 600여 명의 선원·교도관·일반인을 태운 열한 척의 ‘최초함대(First Fleet)’가 영국에서 출항했다. <그림 2>를 통해 당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뉴사우스웨일스로 향하는 유형자 수송선의 내부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비좁은 철창 안에 죄수들이 무리지어 있고 총을 든 교도관들이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여덟 달에 걸친 길고 험난한 항해 끝에 최초함대는 뉴사우스웨일스 지역에 도착했고 오늘날의 시드니 만에 자리 잡았다. 도착일인 1월 26일은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라는 경축일이 됐다. 이때부터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거대한 유형지로 변모했다. 1788~1868년에 16만2000명에 이르는 죄수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유형살이를 했다.
 
그렇다면 백인 국가로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어떤 과정을 거쳐 건설되었을까? 유형수들은 7~14년의 징역살이 동안 혹독한 생활을 참아 내야 했다. 발목에 쇠고랑을 찬 상태로 하루에 12시간씩 노역을 했고, 밤에도 쇠고랑을 찬 채 좁디좁은 오두막 안에서 뒤엉켜 자야만 했다. 불평을 내뱉은 자의 등짝에는 끔찍한 채찍질이 가해졌다. 그러나 지옥 같은 시간에도 끝이 있었다. 온순하게 복역한 죄수들은 형기의 일정 비율을 마치면 다소 자유로운 노동과 생활이 허용됐다.  
 
또한 형기를 마치고 나면 자유의 몸이 되어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가장 높은 임금을 주겠다는 고용주를 찾아 계약을 맺었다. 불운했던 과거를 덮고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새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식민지 총독으로 임명돼 영국에서 파견된 인물들은 이곳을 범죄자 소굴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주해 오고 싶어 하는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준 총독이 1809~21년에 재임한 라클런 매쿼리였다. 그는 벤덤의 파놉티콘을 연상시키는 신형 교도소를 건축해 죄수 관리를 체계화했고, 이어서 다수의 공공건물을 지어 시드니의 도시 인프라를 확충했다.  
 
에드워드 클로스, ‘오스트랄아시아 인들의 복장’, 1817년

에드워드 클로스, ‘오스트랄아시아 인들의 복장’, 1817년

곡물 재배와 양 사육에 쓸 경지도 조성했다. 그리고 형기를 마친 사람에게 12만씩을 무상으로 나눠 주는 과감한 정책을 폈다. 이를 계기로 복역 후에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는 인구가 줄어들었고, 대신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해외 이민자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생활상을 <그림 3>이 보여 준다. 무거운 돌과 통나무를 짊어진 죄수들과 이들을 감시하는 교도관, 그리고 자유로운 민간인이 혼재해 있는 광경이다. 화가는 배경에 공동묘지의 십자가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곳에서의 삶이 힘들고 위험했음을 강조했다.
 
후임 총독 토머스 브리즈번 경의 통치기에 이민자 수는 더욱 증가했다. 마침내 1828년에는 뉴사우스웨일스에 자유민이 죄수보다 많아졌다. 형기를 마친 후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택한 이는 7%에 불과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이민자의 국가로 전환되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뉴사우스웨일스의 자유민들은 식민지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유형을 폐지해 줄 것을 영국 정부에 청원했다. 때마침 영국 내에서는 유형제도가 범죄를 줄이지 못하고 죄수를 교화시키지도 못한다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었다.
 
30만~70만 명의 원주민 삶의 터전 잃어
마침내 1849년 시드니에 입항한 수송선을 마지막으로 이 지역으로는 더 이상 유형수가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전체로는 1868년에 유형인의 유입이 종료됐다. 이후 이민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민자의 국적도 다양화됐다.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약 20%만이 유형살이를 한 죄수들의 후예라고 추정된다. 유형지에서 이민 대상지로의 변모는 오스트레일리아가 황량한 식민지의 위상을 벗어던지고 ‘풍요의 땅’, ‘행운의 땅’으로 신분상승하는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이것의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발전 역사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빠뜨리고 있다. 바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이다. 4만~7만 년 전에 거주하기 시작한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찾아올 무렵 약 30만~7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외지인들이 들어와 영유권을 주장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 생명을 위협받는 신세가 됐다. 가장 비극적인 사태는 대륙의 남동쪽에 위치한 섬 태즈메이니아에서 발생했다. 1820년대에 영국의 식민통치자들은 당시 판디멘스랜드(Van Diemen’s Land)라고 불린 이 섬의 일부를 상습 재범자들을 수감하는 곳으로 삼고자 했다. 3000~1만 명의 원주민이 살던 태즈메이니아에서 식민주의자들과 원주민들의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했다. 1820년대에 영국에 파견된 부총독 조지 아서는 계엄령을 선포해 원주민 사살을 실질적으로 용인했다. 그리고 1830년에 대대적인 군사공격을 가해 원주민들을 좁은 지역으로 몰아냈다.
 
<그림 1>로 돌아가 보자. 태즈메이니아 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나무에 걸어둔 그림판이다. ‘데이비 총독의 대 원주민 포고령, 1816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820년대 말 부총독 아서가 내린 계엄령의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 영국인이 원주민과 평등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원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림과는 너무도 달랐다. 식민통치자들은 계엄령 하에서 공세를 거듭해 결국 원주민들을 거의 몰살시켰다. 집단학살이라고 부를 만한 만행이었다.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는 자연과 천연자원과 사회시스템을 갖춘 선진국이다. 이런 풍요의 국가를 유형자들과 이민자들이 거칠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건설했다는 역사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비주얼 경제사 2권 출간 
송병건 교수의 중앙SUNDAY 연재 칼럼을 다듬고 보완한 『세계화의 풍경들(비주얼 경제사 2)』이 지난달 출간됐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경제사를 전공한 송 교수는 2015년 내놓은 『비주얼 경제사』에 이어 펴낸 이 책에서 고대 로마 제국 이후 약 2000년의 역사 속에서 뽑은 24개의 세계화 관련 사건을 다뤘다. 그림을 시대상을 반영하는 기록으로 보고 그 뒤에 숨겨진 역사적 사실과 함께 경제사적 해석을 더했다. 자칫 딱딱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경제사의 문턱을 그림이라는 비주얼 자료를 통해 낮춰 일반인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풀어냈다. 아트북스, 368쪽, 1만8000원.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bks21@skku.edu